은행 콜센터 AI, ‘협업’과 ‘비용 절감’ 사이
“고객이 ‘대출 좀 알아보려고요’라고 말하면, AI가 ‘사용 목적이 주택 구입이신가요, 생활자금이신가요?’부터 시작해 소득, 기존 대출, 한도까지 단계적으로 끌어내는 흐름은 현재 기술로 충분히 가능합니다.”
금융권 AI 콜센터 시스템을 개발해온 IT기업 다이퀘스트 정승한 이사의 설명이다. 한국어 자연어처리 분야에서 20년 이상 전문성을 쌓아온 다이퀘스트는 국내 주요 시중은행과 카드사의 AI 상담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챗GPT로 대중에 알려진 대규모 언어모델(LLM)이 도입되면서, AI는 여러 단계에 걸쳐 질문을 이어가고 고객이 직접 말하지 않은 의도까지 추론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기술이 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잘 작동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정 이사도 이 차이를 짚었다.
AI 시스템을 만들며 도달한 결론
정 이사는 “가장 큰 차이는 감정의 영역”이라고 했다. “숙련된 상담원은 고객 목소리의 망설임, 질문의 순서, 특정 단어 선택에서 ‘이분은 사실 이게 걱정이시구나’를 직관적으로 감지합니다. 현시점에서 사람의 직관을 완전히 대체하기에는 아직 미흡하다고 생각됩니다.”
금융권 콜센터에는 시간의 문제도 존재한다. 은행에서 새 상품이 나오거나 정부가 대출 규제를 바꾸면, AICC(AI Contact Center, 인공지능 기반 고객센터) 시스템에 반영되기까지 통상 2주가 걸린다. 금융 정책처럼 여러 업무가 얽힌 경우에는 1~2개월까지 늘어난다. 그 사이 쏟아지는 현장의 문의를 응대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건 콜센터 상담원이다.
그리고 예외 케이스 문제가 있다. 다이퀘스트에 따르면 AICC 초기 설계는 전체 업무의 70~80%를 커버하고, 나머지 20~30%는 구축과 운영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보완된다. 상품이나 제도를 설계한 사람들조차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현실에서 계속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발자들은 애초에 모든 업무를 자동화하지 않는다. 정 이사는 “빈도가 낮고 리스크가 높은 케이스는 무리하게 자동화하기보다 상담사 연결로 우회시키는 설계가 오히려 품질과 고객 만족도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익명을 요청한 또 다른 금융권 AICC 개발사 관계자 역시 동일한 방향성을 기반으로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I가 은행이 검증한 내부 자료만을 바탕으로 답변하도록 만들고, 고객이 원하는 답을 찾지 못하면 상담사에게 연결한다는 것이다.
관련 연구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유럽의 한 대형 저축은행 현장 실험에서, AI와 인간 전문가가 함께 제공한 하이브리드 조언은 완전 자동화된 AI 단독 조언보다 고객 수용률이 15.5%포인트 높았다. 인간 전문가의 논리적 우수성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함께한다는 사실 자체가 고객의 신뢰를 높였다고 연구진은 분석했다.
KB금융 경영연구소가 2026년 4월 발표한 보고서 「AI는 모르는 인간의 마음」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연구소는 “의료나 금융처럼 리스크가 크고 개인적인 영역일수록, 고객은 AI보다 사람을 더 믿고 의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정리했다. AI가 더 정확한 답을 내놓아도 고객이 이를 거부하는 ‘알고리즘 회피’ 현상도 지목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단호하다. “금융 서비스의 진정한 경쟁력은 기술의 ‘높이’가 아니라 인간 본성을 향한 이해와 포용의 ‘깊이’에서 결정된다.”
국제노동기구(ILO)도 2026년 2월 보고서에서, AI가 할 수 있다는 것이 곧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짚었다.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도입되는지는 기술이 아니라, 제도와 조직의 선택이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AI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들도, 연구하는 사람들도, 소비자 데이터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금융처럼 복잡하고 리스크가 큰 영역일수록, AI를 사람을 대체하는 도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은행도 공식적으로는 같은 입장
이를 도입한 은행 측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디프레임의 질의에 KB국민은행은 “단순·반복적인 문의는 AI상담서비스가 처리하고, 복합적이고 개인화된 상담은 상담직원들이 응대함으로써 협업하는 형태의 콜센터를 운영하고 있다”고 답했다. ‘AI에 의한 대체’가 아니라 단순 업무는 AI가 맡고 복잡한 상담은 사람이 맡는 협업 모델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다.
금융당국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융감독원은 2025년 8월 KB국민은행에 대출 상환 등 고객정보를 다루는 업무를 외부 업체인 콜센터에 위탁하는 것을 제한하라고 권고했다. 소비자보호 측면에서 고객의 계좌 정보 등 민감한 개인정보를 다루는 업무를 외부 하청업체에 맡기는 것은 위험도가 높다는 판단이었다.
KB국민은행은 이 권고에 따라 2025년 8월부터 콜센터를 통한 대출 상환 업무를 중단했다. 이 조치는 은행 콜센터가 다루는 업무가 단순 응대를 넘어 고객 자산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본질적 업무라는 점을 규제당국이 인정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현장에서는 ‘비용’이 성공의 기준
AICC 프로젝트의 ‘성공’을 고객사인 금융사가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질문에, 다이퀘스트는 자동화율, 응답 정확도, 고객 이탈률 등 여러 지표를 나열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결국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가 가장 큰 성공 여부로 판단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앞서 언급한 또 다른 개발사의 판단 기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회사는 전체 문의 콜 중 40%를 AI가 처리하면 성공적인 AICC 구축으로 본다고 했다. 단순 문의와 약관 설명을 AI가 맡아 상담사에게 집중되는 콜의 양을 줄이는 것이 목표라는 것이다.
도입 목적이 ‘협업 품질’이 아니라 ‘비용 절감’이면, AI는 보조 도구가 아니라 대체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좋은 AICC 설계의 핵심은 상담사의 현장 경험이라는 것을 다이퀘스트 관계자들은 강조했다. “AICC는 상담 현장의 노하우가 그대로 품질로 연결되는 영역”이라며, “개발 초기부터 상담원 인터뷰를 통해 요구사항을 도출하는 과정이 반드시 포함된다”고 했다. 모호한 질문이 들어왔을 때 고객을 어디로 안내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은 “실제 상담을 오랫동안 하신 분들”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협력은 쉽지 않다. 개발자들은 은행 AICC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콜센터에 갔을 때의 분위기를 기억한다. 경영진은 ‘협업해서 잘 만들라’고 지시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이런 걸 왜 해야 해’라며 방어적이고 비협조적이었다.
15년 차 콜센터 상담원 A씨는 “많은 상담원들이 ‘내 목을 내가 가져오는 셈’이라며 자신들을 대체할 시스템 구축에 협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은행 콜센터 대부분이 외부 하청업체를 통해 운영되는 구조인 데다, 이미 고용 불안이 만연한 상황에서 AI 도입을 이유로 인력 감축까지 이어지자 상담원들 사이에서는 AI 시스템 개선에 협조할 동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다이퀘스트의 또 다른 임원은 이 구조를 이렇게 정리했다. “협업이 잘되려면 현업과 개발하는 쪽과 경영진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가야 되는데 그렇지 않으니 중간에서 쉽지 않다. 경영진은 비용을 아끼는 게 좋으니까 콜센터 인력을 줄이고 싶어하지만, 콜센터 직원들은 계속 일하기를 원하니 협력이 쉽지 않다.”
결정과 영향이 분리되는 자리, 하청 구조
이 어긋남은 개별 콜센터 상담원들의 비협조라기보다 구조의 문제다.
박홍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KB국민은행 콜센터 직원 945명 전원이 위탁고용이며, 신한은행은 91.6%(690명), 우리은행은 85.4%(717명), 하나은행은 84.1%(593명)가 위탁고용 상태다. 공공운수노조 든든한콜센터지부 관계자는 “콜센터가 실제로 핵심 업무를 수행해 왔고, 이를 통해 업무 처리 능력도 입증됐다”고 말했다.
은행 콜센터는 고객의 자산과 민감한 개인정보를 다루는 은행 업무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앞서 금융당국이 제한을 권고한 ‘대출 상환’은 그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이 업무를 직접 수행하는 상담원 대부분은 용역업체 소속이고, AI 도입 결정은 원청인 은행에서 이루어진다.
결정하는 사람과 영향받는 사람 사이에, 하청 구조가 있다.
상담원 처우에 대한 책임도 이 구조에 따라 작동한다. KB국민은행은 디프레임에 “상담직원 소속 협력업체 자체적으로 상담직원들에게 필요한 업무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답했다. 은행은 AI 시스템을 도입할 뿐, 상담원 처우는 협력업체, 즉 하청업체 소관이라는 설명이다.
콜센터 상담원의 의견 수렴 절차에 대해서도 은행은 “주기적으로 업무개선 필요사항에 대해 청취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청취의 빈도나 방식, 의견이 실제 시스템에 반영된 사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답하지 않았다.
좋은 AICC가 상담 현장의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면, 그 노하우를 가진 사람들이 협력하지 못하는 구조에서 좋은 AICC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비용 절감을 성공 지표로 삼는 한, 협력에 대한 유인도 생기지 않는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
AI를 개발하는 기업과 연구자, 규제당국, 심지어 고객 데이터까지도 AI를 ‘보조 도구’로 활용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실제 도입을 결정하는 은행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그 논의는 ‘비용 절감’이라는 단일한 지표로 수렴된다.
이러한 수렴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에는 하청 중심의 운영 구조가 있다.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와 그 영향을 직접 받는 현장이 분리돼 있는 한, ‘협업 모델’이라는 공식적 설명과 ‘비용 절감’이라는 실제 운영 기준 사이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앞선 기사에서 살펴봤듯 비대면 거래 확대와 영업점 축소가 이어지면서, 은행 콜센터는 사실상 ‘비대면 영업점’의 역할을 맡게 됐다. 금융당국 역시 콜센터 업무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시작한 상황이다. 결국 이 업무를 AI와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는 단순한 기술 도입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에 가깝다.
참고자료
- Cathy Yang et al., 2025, "My Advisor, Her AI, and Me: Evidence from a Field Experiment on Human–AI Collaboration and Investment Decisions", Management Science, 72(1), 242-264.
-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2026년 4월, 「KB 지식 비타민 2026-06호: AI는 모르는 인간의 마음」
- ILO, 2026년 2월, 「Workers' exposure to AI: What indicators tell us — and what they don't」.